2018. 2. 25. 23:50





"...여기 오고 있다고?"

하필이면 타이밍도 참 그랬다. 순영과 승관이 선곡해놓은 정신없는 노래들이 한참 흘러가다 막 다음 곡으로 넘어가던 찰나였고 하필이면 내가 골라 넣은 느린 곡이 나오고 있었다. 그 덕분에 큰소리로 통화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목소리가 대번 튀어 관심이 한 번에 쏟아졌다. 호기심과 장난기가 발동한 눈동자가 모니터 너머에서 빼꼼 올라오고 내 한참 앞 데스크를 쓰고 있는 막내도 날 돌아본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인상을 쓰며 할 일 하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더 능글맞아지는 눈초리들. 그렇게 상극인 것 마냥 굴면서 이럴 땐 또 죽이 잘 맞고 그러지.

- 놀러가자.
"지금?"
- 아.. 나 너무 지금 막무가내로 그러냐
"아냐, 나 그렇잖아도 슬슬 들어가려던 참이었거든. 타이밍 잘 맞게 전화 했네 싶어서."

오고 있다는 말이 앞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갈 정도로 순식간에 마음이 급해졌는데 혹시나 그게 티라고 날까 싶어서 일부러 어투를 꾹꾹 눌러 말했다.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승철이 음, 하고 물린 소리를 내는 사이 띄워둔 프로그램이며 메신저를 하나씩 종료시키던 화면 속 마우스 커서가 갈 곳을 잃고 화면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닌다. 그게 딱 지금 내 기분이었다.

날 픽업할 위치를 고민했던 모양이었던지 만날 장소를 설명해준 후에야 끊어진 전화를 붙들고 어깨까지 들어갔던 힘을 뺐다. 내가 만나자고 할 때야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라 괜찮은데 연락이 와서 받을 땐 어쩐지 좀 진정이 안 될 때가 많아 늘 긴장을 했다. 열아홉에도 이런 적은 없지 싶은데. 이 나이 먹고 이럴 일인가 싶기도 하고 저쪽은 이런 흑심 같은 거 조금도 모를 텐데 이렇게 혼자 앓을 일인가 싶기도 해서 헛웃음이 나왔지만 지금 당장은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 밖을 넘겨다보면 날은 한참이나 화창하다.

"들으셨다시피 저 약속 생겨서 먼저 퇴근 좀 하겠습니다."
"이지훈이 여자 생김?"
"친구"
"그래서 여자예요?"
"남자. 오늘 마무리 못한 건 내일 오전 중으로 넘겨줄게"

뭔가 재밌는 걸 하나 물었다는 듯이 요만큼도 다르지 않은 개구진 얼굴을 하던 둘이 이젠 대놓고 김빠진 얼굴을 해댄다. 어이구, 진짜 영혼의 단짝 나셨네.

"야 막내야, 이지훈이도 뺑끼치는데 우리도 좀 쉬었다 하면 안 되냐?"
"닥쳐요, 지금 내가 이 날 좋은 황금 같은 주말에 누구 때문에 출근했는데."

누가 상사고 누가 부하직원인지 모를 법한 만담 같은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미운정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저러다 둘이 정분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책상을 정돈하고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 일어나는데 문득 신발을 보고 아차 싶었다. 얼마 전에 충동적으로 새로 산 단화였는데 골드컬러가 생각보다 튀고 화려했다. 거기에 주말출근이라 롤업한 찢어진 진에 베이비핑크색 니트. 이거 좀 너무 어려 보이려고 노린 것처럼 애 같지 않나?

"야"
"뭐요, 나를 버리고 가셔서 발병날 이지훈씨"
"나 오늘 이상하냐?"

막내에게 까이고 나서는 나이 값 못하고 또 삐쳐가지고 지루해 죽겠고 하기 싫어 죽겠다는 말을 온통 얼굴에 써넣고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달칵거리던 순영이 모니터 옆으로 쑥 고개를 내밀더니 날 위 아래로 훑어보고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 얼굴로 볼을 씰룩거렸다. 그 표정을 보자마자 후회한다. 그래, 내가 물을 사람을 잘못 골랐지?

"진짜 여자 아니라고?"
"됐다."
"와 이지훈 혼자 봄이야 막?"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우리가 계절이라면_5월
w. 공장장





서둘러 걸어오다가 차를 세워두고 운전석 옆에 서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승철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늦췄다. 비 흡연자를 배려하느라 간지럽게도 나와 있을 때는 담배를 잘 꺼내들지 않는 승철은 이만큼 멀리 있음에도 내가 부르는 소리에 들고 있던 담배를 꺼트릴 것이 뻔했다. 그리고 사실 승철이 담배를 태우는 모습을 두고 보고 싶기도 했다. 무료한 얼굴로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를 조금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고 다시 담배를 쥐는 손가락과 손마디, 반쯤 내리깐 시선 위로 풍성하게 드리운 짙은 속눈썹 같은 걸 구석구석 구경하며 지난 10년 내가 알지 못하는 승철의 성장을 상상해본다. 저토록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졌을 그 과정을.

짧아진 담배를 꺼트리고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다 날 발견하고는 순식간에 환해지는 얼굴에는 또 가슴 한켠이 어쩐지 찡해져 와서 나는 눈썹을 어색하게 내려 웃는다. 지훈아 하고 부르는 입모양과 목소리와 다정하게 휘어지는 눈동자에는 그러니까 정말 말도 못하게.

뭐라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감정들이 가득 차올라서 고개를 살짝 숙여 웃었다.

아, 진짜 어쩌면 좋냐. 나 진짜 아직도 네가 너무 좋은가봐.



-




둘 다 점심은 이미 먹었고 주말이라 그런지 가지고 나온 승철의 차를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아서 커피를 두 잔 사와서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사올 테니 기다리라 했더니 굳이 따라나선 승철은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날 빤히 내려다봤다. 모른 척 하려다 그 눈빛이 하도 집요해 왜 그렇게 보냐 물었더니 너 오늘 좀 귀엽다. 하며 정말 애를 다루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온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면 눈이 또 이렇게 휘어져서 웃는데 얘 진짜 이러면 내가 말문이 막힌다는 거 알고 이러나. 귀 끝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져서 슬그머니 손을 올려 귀를 만지작거렸다. 뭐 그런 설레는 말을 막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그러냐 넌.

마트 앞에서 짐을 실어주던 날은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승철의 차는 은근히 볼거리가 많았다. 광합성으로 움직이는 장난감 몇 개와 백미러와 창가에 붙어있는 피규어 같은 것들이 그랬다. 괜히 한 번씩 손으로 건드려 보면서 너네는 좋겠네, 매일 최승철이랑 봐서. 하고 실없는 생각을 좀 했다.

몇 번의 만남이 그래왔듯이 대화는 자연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심심하고 싱거웠다. 차가 한강을 인접한 도로 쪽으로 옮겨갈 쯤엔 내 아메리카노도 승철의 라떼도 얼음이 반쯤 녹아있었다. 햇빛이 표면에 녹아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핸들 위쪽을 쥔 양 손을 본다. 적당히 남자답고 투박한 손을 물끄러미 보며 차마 직접 묻지 못하는 흔적 같은 걸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예상하기엔 좀 어려웠다. 역시 여자친구..는 없는 걸까. 벌써 이렇게 만나는 횟수가 차곡차곡 쌓여 가는데도 서로의 가장 가까운 부분은 묻지도 못했다.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나이가 나이인 만큼 으레 결혼얘기로 흘러가게 될 테고 뭔가 그런 이야기를 승철과 나눈다는 게 어쩐지 껄끄러울 것 같아 묻지 못했는데 승철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묻지를 않아 타이밍을 놓친 것도 있었다. 흐르는 생각을 붙잡지 못하고 내버려두니 그 끝엔 아주 환하게 웃는 얼굴로 청첩장을 내미는 승철까지 닿았고 나도 모르게 으,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지훈아, 어디 불편해?”
“어, 아냐 딴 생각 좀 하느라.”
“지겹지. 내려서 좀 걸을까?”

잠깐 그렇게 정신을 놓은 사이에 차는 한강공원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주차를 하고 이제는 다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들고 나란히 걷는다.

"진짜 나 때문에 무리해서 나온 건 아니지?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불쑥 찾아간 것 같아서."
"아냐, 난 오늘 안 나와도 되는거였는데 누가 좀 징징거려서. 슬슬 지겹던 참이었어."
"나 얼마전에 네가 만든 집 나오는 잡지 기사 봤어. 멋지더라, 예쁘고. 이제 진짜 그림 쪽은 아예 손 놓은 거고?"
"가끔 손 심심할 때만 잠깐잠깐. 너는?"
"나?"
"그림 안 그리냐구."

승철은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난 뭐 사실 그 쪽에 소질도 없었고 그래서 미련도 없었어. 잠시 멀리 시선을 두는 듯 하던 승철이 다시 날 돌아봤을 땐 웃는 얼굴이었고 자연스럽게 내 손에서 빈 데이트아웃잔을 가져다 들고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사소한 배려가 익숙해 보여 거기서 다시 만나는 사람의 유무를 따져봤다. 궁금한데 묻고 싶은데 또 알고 싶지도 않기도 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저울질을 한다. 다시 강물 너머로 시선을 두는 승철의 옆모습을 가만 올려다보다 역시 물어봐야겠다 마음을 먹었는데.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어?"
"너 늘 들고다니던 드로잉북 있잖아."
"아..."
"늘 궁금했거든. 그 안에 네 그림들. 아직 보관하고 있어?"

책상서랍 제일 아래칸 깊숙한 곳에 쌓여있을 것이다. 가끔 그 칸을 열어보기는 했지만 꺼내서 펼쳐본지는 좀 오래되었다. 승철 만나기 전까지는 잊고 살기도 했고. 그 마트에서 승철을 만났던 날 정말 오랫만에 서랍을 열었었지만 쌓여있는 드로잉북을 한 권도 꺼내보지는 못하고 물끄러미 보다가 서랍을 닫았었다.

"아마 어딘가 있을거야."
"그 땐 딴에 경쟁의식도 있었고 그래서 말 못했는데 나 네 그림 좋아했어."

마음이 간지러워진 탓에 또 묻지를 못했다.


-




끝내는 포기선언 하긴 했지만 나 이건 올린 줄 알았지. 2월부터 다시 읽다가 생각나서 일단 써둔대까진 올려둬요. 이게 얼마만에 쿱지야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