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23. 16:01

중간까지 읽을때는 이 무슨 저자의 tmi 같은 걸 책으로 다 냈나 싶었는데

중반 이후의 이야기가 맘에 든다 




-


166p.
북경에 있는 친구 집에 갔을 때도 그랬다. 상상 이상으로 크고, 복잡하고, 사람이 많고, 공기가 텁텁한 그 도시에서 나는 다섯 살 어린아이처럼 친구 곁에 딱 붙어 있었다. 중국어도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내게 그 도시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불가해했다. 유명한 관광지도 딱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친구에게 말했다.
"후통에 가자. 내가 책에서 봤는데 후통은 내가 좋아할 것 같아."
친구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후통은 골목이라는 뜻이야. 골목은 어디에나 있어. 지금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많이 없애고는 있지만. 우리 집 바로 옆에도 있어. 슈퍼 갈 때 후통을 통해서 가보자."
그리고 결과는? 나는 이름도 모르고, 유명 관광지도 아닌 후통에 들어갈 때 제일 신났다. 착한 친구는 한국에서 건너온 이상한 취향의 나를 데리고 자기도 처음 들어가보는 후통을 찾아다녀주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 나를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이유는 필요 없다. 동의도 필요 없다. 내가 이 사진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낯선 도시에 도착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나는 낯선 골목으로 접어든다. 지도 밖으로 벗어난다. 속살로 접어들수록 더 낡은 벽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 벽의 사진을 찍고 나면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나조차도 설명할 수 없다.


-


270p.
이 세계에서 나는 때때로 열등감에 괴롭다. 때때로, 라는 부사로 얼버무리기에는 조금 자주, 괴롭다. 롤랑 바르트식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카피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네 번 괴로운 셈이다. 카피를 잘 못 쓰기 때문에 괴롭고, 그 사실에 스스로를 비난하기에 괴롭고, 내 무능력으로 프로젝트가 덜그럭거려서 괴롭고, 내가 그토록 평범하고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또 괴로워한다.
답이 없는 괴로움이다. 끝이 없는 괴로움이다. 이 일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이다. 일희일비하지 말자, 라고 늘 스스로를 다독인다. 분명 내가 잘하는 날도 있으니, 나라고 언제까지나 지진아에 머물러 있진 않았으니, 일희일비 하지 말자.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다독이고 또 다독인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괴로워도 힘들어도 매일 다른 팀원이 써온 카피와 내 카피를 비교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젯밤에 아무리 공들여 썼더라도, 비교를 하고 더 나은 카피를 골라내야만 한다. 나의 노력은 뒤로할 줄 알아야 한다.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해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무엇이 더 좋은 카피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니까.
'내가 쓴 카피'라는 마음을 지워버리지 않으면 팀원으로 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공동의 작업이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내 고민의 결과가 별로라고 생각되는 날에는 괴롭다. 표현하기엔 너무 구차한 괴로움이라 그 사실이 또 괴롭다. 연차가 쌓이면 쌓일수록 옅어지는 괴로움이라기보다는, 더 잘 숨기게 된 괴로움이다. 나는 때때로 아주 많이 괴롭다.